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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15:28

당신들이 참 좋다 기억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변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주관적인 기준은 환절기 일교차만큼이나 변화무쌍했다. 슬슬 머리가 크고, 머리의 피도 말라가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이제는 조금씩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기준들이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당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01.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


 며칠전 출근을 하고보니, 책상 위에 커피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게 뭐지?' 싶어 살펴보니 노란 포스트잇에 둥글둥글한 글씨가 적혀있다.

여러가지로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이번 학기, 연구실에 새로 들어온 막내가 두고 간 것이었다. 연구실 스터디에 필요한 책들을 제본해야 하는데, 내가 퇴근한 사이에 내 자리에 있던 책을 가져가 제본했다는 사실에 감사(혹은 미안?)하다며 이런 호의를 베풀었다. '칼퇴근만이 정답이다'는 사명감에 젖어 정시 퇴근을 해, 당신이 빈 사무실에 방문하게 만든 것이 되려 미안했다.

  •  저 : 고맙다. 잘 마실게. 날씨도 좋은데, 오늘도 편안한 하루 보내기를.
  • 당신 : 날씨가 좋죠? 선배도 사무실 문 활짝 열어두세요!

 쑥쓰럽게도 누군가에게 이런 호의를 받아본지가 가물가물해서 기분이 좋았다. 기운내라는 의미에서 시구를 하나 적어서 보내줬더니, 좋아하더라. 기특한 것.

 그리고 다음날,

똑똑똑. 아침 식사 하셨어요?

 다음날도 날씨가 좋아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사무실 문이 열려있어서인지 말소리로 노크를 하며, 막내가 들어온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에 <빙그레 뚱땡이 바나나우유>를 건넨다. 어쩜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로만 골라서 가져오는지, 어휴. 마침 홍보조교를 하고 있는 막내는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입학설명회 홍보 문자를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사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또 그 일에 감사하다며 이런 좋은 양식(?)을 선사한 것이다.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받은 호의는 꼭 잊지 말고 돌려주자는 것이 나름의 사명감인 나. 이유없이 바쁜 기분이 드는 대학원생이 유일하게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금요일. 덕분에 막내를 데리고 함께 전시를 다녀왔다. 함께 사회인 야구를 하는 선배가 전해주신 공짜 티켓을 요긴하게 썼다.

 "저는 그냥 모든게 다 감사해요. 웃기죠?"라고 멋쩍게 웃는 막내 녀석은 등장하는 곳이 어디든 그 곳을 밝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시를 관람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막내가 테이블에 널부러진 냅킨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  저 : 막내야, 너 다 쓴 냅킨 수집해?
  • 당신 : 아뇨. 이거 저희가 쓴거잖아요. 치우기 더러우니까, 제가 이렇게 모아두려구요.
  •  저 : 너희 부모님 어떤 일 하셔?
  • 당신 : 어머니가 식당을 하세요. 그래서 가끔 일도 도와드려요.

 "사람들이 다들 너는 뭘 그렇게 감사한게 많냐고 묻더라구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냥 감사한데..." 라고 말하던 우리 연구실 막내. 모쪼록 이렇게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예쁜 사람이 '사회생활'이라는 미명아래 병들지 않고, 쭈욱 그 빛을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아, 물론 내 방송을 들어주고 "덕분에 에너지가 불끈 솟아요"라며 방청 후기를 남겨주었기 때문에 칭찬하는 것은 아니고...





 # 02. 나에 대한 소개를 망설임없이 하는 사람


 아주 오랜만에 L과 함께 오티조 동기를 만나, 셋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  형 : 야, 그럼 너는 가위손이랑 매일 같이 있으면서 무슨 얘기 하냐?
  •  엘 : 어? 인생 얘기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 함께 '서로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혹은 하고 싶은) 리액션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해서 상대가 털어놓는 그 어떤 이야기에도 맞장구 칠 수 있는 공감력을 기르는 것이다.





 # 03. 개수작 FREE한 (여자) 사람


 유독 가깝게 지내는 여자 사람들이 많다. 언니로 살기를 결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셈인데, 덕분에 내게는 보통의 기준으로는 '그게 말이 돼?'라는 사이의 관계들이 제법 있다. J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괴랄맞은 취향이 같은 J는 요근래 만난 사람 가운데, 만날 때마다 나를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도도함과 자기연민이 뒤섞인 케릭터가 특징인 이 친구와의 만남은 늘 즐겁다. 서로 한 가지씩 배움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수작 FREE한 관계라는 점이 그와 나의 유대감을 더욱 끈끈하게 한다.

 '그윽한 밤을 보냅시다'는 제안에 시작된 급번개에서 그녀는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등장했다. "무거운걸 들고 다니냐, 내가 들어줄게"라고 거침없이 말을 할 수 있고, 상대 역시 '아.. 혹시 이거 그린라이트인가?'라며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이 날은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중고 서점에 들러 이름이 가장 예쁜 책을 한 권 선물했다. 그리고 에펠탑 앞에서 키스하는 연인의 사진이 프린트 된 엽서를 한 장 써줬다.
 
 다음날, J는 '짜릿하게 키스할 수 있는 사람, 꼭 만나자 ㅠ_ㅠ'는 울분 섞인(?) 내용이 담긴 엽서 사진을 페이스북에 포스팅 했다. '이거 완전히 썸타네'라는 지인들의 덧글에 '저는 썸타면 이렇게 페북에 자랑이나하는 그런 쉬운 사람 아닙니다'라고 위트있게 대처하는 모습이 참 재미있다.

 한강에서 술 마시는 것은 각자의 썸남, 썸녀가 생기면 가는걸로 합의하고, 함께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날씨가 이렇게 변덕을 부린다면, 조만간 J와 함께 와인과 맥주를 사들고 한강으로 향할지 모르겠다. 늘 그렇듯 개수작은 FREE.





 # 04.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사람


  •  저 : 옛날에는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영화, 책, 음악을 함께 보고 싶었거든요. 요즘은 조금 달라졌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음악, 책에 대해서 얘기하면, 상대는 다른 영화나 음악을 추천해줘요.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 서로 그 얘기를 하는거예요. 말 그대로 제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사람이 좋아요."

 며칠전 체육대회를 마치고 함께 조교로 근무하는 누나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  저 : 저는 언젠가 웨건을 하나타고 미대륙을 횡단해보고 싶어요.
  • 당신 : 나도 더 늙기전에 해보고 싶어. 먹을 것들 다 싸가지고 다니면서 여행하는거야!

 미국 대륙횡단에 대한 각자의 로망을 각자 이야기하다가 결국 여행 경험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누나는 미국 유학당시 방문했던 그랜드캐년에 대한 감상, 그리고 인디언에 얽힌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다. 넋이 쏙 빠진채로 들었다. '아, 정말 여행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대화의 주제는 여행에서 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분께서는 윌리엄 폴의 <오두막>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다소 종교적일 수 있지만) 신을 믿던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를 통해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알아가는 내용이라고 말씀하셨다. 단번에 그 이야기에 꽂혀, 며칠전 도서관에서 그 책을 대여했다. 그리고 마침 오늘 오후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전에 그 분께서 사무실에 오셨다.

  • 당신 : 아, 너가 없었어야 더 좋았을텐데. (책을 건네며) 생각나서 샀어.
  •  저 : 헐!! 대박!! (대출한 책을 보여주며) 누나 정말 짱이네요!! 감사해요!! 

 그랜드캐년과 인디언의 역사에 얽힌 여행 이야기를 해주고, 상처에 대한 문학작품을 들려준 고마운 당신에게 나도 내일은 내가 감동받은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싶다. 아, 물론 당신 역시 내 방송을 들어보시고 "야, 너무 좋다. 내가 다른 출연자들 소개시켜줄게. 내 주변에 그런 사람 많아!"라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고...(긁적)

가위손아~
생각나서 한 권 샀어. ^^
언젠가 이 책이 막 자기 읽어달라고 부르는 것 같을 때 읽어보기 바래
가을도 끝자락인가보다.
매일매일 아름답게 채워가길 바래 안녕~





 나는 당신들이 참 좋다. 나에게 늘 감사함과 배움을 주고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당신들이 참 좋다. 우리의 대화가 직장상사와의 스트레스, 티비프로그램의 시청소감으로 채워지지 않아 더욱 좋다. 계절의 변화로 느끼는 서로의 감정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타인의 취향을 넓혀줄 수 있는 자신의 취향을 가지고 있는 당신들이 좋다. 모쪼록 당신들과 함께 오래오래 늙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우디앨런 영감의 말을 인용해서 당신들에게 한 마디하고 싶다.



사랑만이 해답이야! 오래오래 사세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위손.





 덧붙여 오늘 갑작스레 통화 한 이후, "네 목소리 좋더라"고 문자 보내신 형도 오래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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